세계대전과 인권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가운데 나타났던 국제연맹과 연합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전쟁과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1차대전과 국제연맹
● 1차대전
1차 세계대전은 1914 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데요.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들의 전쟁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 계기는 사라예보 사건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페르난트 대공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에 의해서 암살되는 사건 사라예보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오리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르비아에게 최후 통첩을 하게 되는데요. 세르비아의 반 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시키고 암살자와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하고 그리고 반 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하며 그리고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에 입국해서 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을 조사하는 것을 허용해 달라라는 통첩을 하게 되는데요.
앞에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세르비아가 동의하지만 마지막에 대한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른 나라의 관리가 들어와서 이걸 조사하는 것에 대한 그 동의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이것을 기점으로 이제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거죠. 근데 당시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세계 대전은 연합군과 동맹국이라는 있는데, 연합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함께하게 되고 동맹국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과 독일 터키가 여기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독일의 지중해 진출 정책이 서로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맞붙이게 된 거죠. 그래서 이러한 정책의 갈등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범게르만주의와 범 러시아 세르비아의 범슬라브주의가 갈등을 일으킨 그런 내용들을 이제 담고 있습니다. 발칸반도에서 이런 갈등이 일어났고 그리고 또 1914년에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서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갈등하게 된 거죠.
아프리카 에서 독일 같은 경우는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들를 연결하는 3B정책 이 있었고, 영국 같은 경우는 카이로 케이프타운 그다음에 이제 인도의 콜키타라는 3C정책이 있었는데, 이 접경 지역이 이제 이루어진 게 아프리카였던 거죠. 그래서 거기에 식민지 쟁탈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과 독일이 서로 적대 국가로 전쟁을 벌이게 됐던 거죠.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신무기들이 인제 사용이 됐는데요. 참호전과 전투기, 전차, 독가스, 기관총, 수류탄 등을 이용해서 생화가스라든지. 이런 것들도 이용이 됐고.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게 도었습니다.
1차대전은 70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투입됐던 전쟁이고 940만 명이 전사했고 1500 여명이 부상당하는 기록적인 전쟁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1차 세계대전은 사실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연합해서 당시 후발주자인 독일과 갈등을 빚게 된 결과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결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이 됐는데요. 베르사유 궁에서 조약이 체결됐었습니다.
● 베르사유조약
독일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게 되면서 조약에 가입을 하게 되는데 그동안 징병제로 군인을 유지했던 모병제 시행을 강화하는 조약이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그리고 조약 안에는 독일한테 많은 전쟁 보상금을 부여하고 영토를 반납하는 사항등 경제적 측면이나 군사적 측면에 다양한 요구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1차 세계대전으로 얻은 모든 영토를 반납함으로써 식민지를 모두 반납하게 되고 프랑스랑 접경한 라인란트 지역에 있는 군대는 모두 해산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된고 잠수함이나 전투기를 보유하는 것도 금지되고 지상 병력의 수도 제한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돈을 승전국에 배상해야 된다. 그리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조항들이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나왔을 때 이 조항이 나중에 더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케인즈라는 경제학자였어요. 수정 자본주의의제 대표자으로 국가가 자유시장 경제를 조절해야 된다고 봤던 케인즈는 독일한테 저렇게 많은 배상금을 물게 되면 독일은 더 이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견했었는데 이후 세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국제연맹
국제연맹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1920년에 만들어졌죠 국제연맹는 이사회 총액 사무국이 기관으로 운영이 됐고. 제네바에서 본부가 운영이 됐습니다. 그리고 국제연맹과 관련해서 보조 기관으로 국제노동기구라든지. 상설국제사법재판소 등이 설치가 됐는데요. 국제연맹에서 다루는 문제는 군축, 분쟁 그리고 안보 제재 위임통치 등에 대한 안보 문제, 노동, 여성, 아동보호, 상업의 자유, 질병, 통제와 같은 경제적 사회적 문제 등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국제연맹은 나중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2. 2차세계대전과 국제연합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8일까지 2차 세계대전으로 구분을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군이 폴란드 국경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는 경제 대공항입니다.
미국발 경제 공항에 오는데 1929년 10월에 미국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미국 노동자의 사분의 일 이상이 실업에 직면하게 되고 이러한 것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독일은 전쟁 보상금으로 인해서 생활이 피폐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경제적 위험들에 직면합니다.
두 번째로는 파시즘이 등장입니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특히 민족주의을 잘 이용을 했는데요. 아리한 민족이 가장 우수한 혈통을 자랑하고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연합국과 주축국으로 구분이 될 수 있는데, 유럽에서는 독일과 영국 간의 전쟁 그리고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들을 유럽에서 일어났고 그다음에 아시아와 태평양에서는 중일 전쟁과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연합국 측은 중국, 프랑스, 영국, 소련, 미국이고 동맹국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나중에 일본까지 여기에 포함됩니다.
2차 세계대전은 민간인 사망률이 급증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군인과 민간인 사망률을 보면 10대1로 군인이 집중적으로 사망하는데 비해 2차대전은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 60%에 달했습니다. 즉 민간인 대량 학살들이 이루어졌던 전쟁이 2차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는 민족 우월주의,인종 우월주의입니다.
인종 우월주의가 창궐했던 독일은 나치당은 투표로 집권하게 했고 이들은 당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밀턴 마이어라는 미국 기자가 전쟁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분명히 독일인들은 억압된 구조 안에서 이런 일을 어쩔 수 없이 했을거라는 가정하에 취재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자신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훨씬 더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독일인들을 인터뷰를 해 보니까, 그때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죠. 이렇게 표현하더라 그리고 좋은 발전을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국제 정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인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부와 상관없어요. 정부 형태는 그거랑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죠. 어떤 사람 들한테 돈이나 기회가 되면 체제에 대해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 또 어떤 독일인들은 정치 체제나 그런 거는 상관없다.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다 돈 버는 기회라든지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나치는 우리한테 직업을 줬어요. 빵을 줬어요. 그래서 나는 당시에 자유로웠어요. 이렇게 증언을 했던 독일들이 대다수였다.
한 사람 그중에 한 사람만 내가 당시 만약 저항했었더라면 달라졌을텐데 라는 증언을 했다라고 하는데 그 당시 독일인들이 어떻게 보면 나치에 동의하고 협력했던 대중 선동이 이루어졌던 상황들을 이제 밀터 이어는 폭로를 하게 되거든요.
그때 프리모 랩빈의 이탈리아 유대인은 포로 수용 유대인 수용소에 갇히게 됐죠 그리고 속에서 인간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당시 독일인들한테는 이러한 만연한 태도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 한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알면 피곤해져 그리고 아는 것을 말하다가 큰일 날 수도 있어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들은 경계하거나 대답하지 않는 고의적 태만함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밀턴마이어의 그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리모에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이라는 책에서 독일 평범한 독일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가 다양됐던 것은 독일인들이 고의적 태만함을 가지고 자신의 어떤 인간적 가치보다는 생존에 매몰되어 있던 독일인의 모습으로 그런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나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라는 책을 통해서 사유불능과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제 그 철학적 고찰을 하게 되는데요. 한나아렌트가 이제 아이히만이라는 전범이 잡히게 되면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하게 되는 거죠.
아이히만은 당시 유대인 학살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게 된 공무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고안했던 게 뭐냐면 이동식가스실이였던 거죠. 그래서 어느 곳에나 가스실을 설치해서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는 그런 방 고안해는데 이 아이만은 전쟁이 패망한다는 걸 알고 라틴 아메리카로 이제 2주를 하게 돼요. 거기에 많은 독일 나치범 전범들이 있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자로 살다가 국제 경찰한테 발각이 돼서 이제 예루살렘의 재판에 인제 서게 됐던 거죠. 근데 아이히만이 꾸준히 주장하는 게 뭐였냐면 나는 나의 맡은 발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공무원은 정부가 어떤 명령을 하게 되면 거기에 순응하고 일을 한다라는 거죠.
그리고 정신분석가들도 아이히만을 봤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그런 이제 정신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성실한 한 사람이다.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들을 한나아렌트라는 이 유대인 여성 철학자는 미국에서 이제 교수로 있으면서 자기가 언론에 이것을 이제 기고하겠다. 해서 재판 과정을 전체를 바라보게 되거든요. 근데 그러면서 봤던 것이 아이히만은 자기 목소리가 없었다는 거예요. 굉장히 공무원적인 사무적인 용어를 사용했고 자기 의견이라든지.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어떤 업무 지시가 내려지면 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것인가를 생각했지 이 일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 그게 이 사람의 죄였다라고 한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 불능과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았을 때 악이 창궐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이제 기본적인 맥락입니다.
앞서 논의했던 마이어의 ‘그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독일인들 자신의 생존만에 매몰돼서 지금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일들이 어떤 효과와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인들 그리고 고의적 태만함으로 사유를 하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독일인들. 그러한 태도가 사실 나치즘이 600만 명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두었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제 2차 세계대전은 어떤 파시즘 정권의 그러한 권력이 자행된 그런 전쟁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았을 때 그런 정권을 뽑고 정권의 권력이 그런 방향으로 나갈 놔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전쟁이 아니었나 이런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차이
2차 세계대전이 이제 독일에 패전으로 이제 끝나면서 국제연합이 이제 만들어지게 되는데 국제연맹과 비교해서 국제연합은 좀 더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다음에 국제연맹 같은 경우는 이사회의 표결을 만장일치가 아니면 결의를 할 수가 없었는데 UN 같은 경우는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함으로 인해 어떤 사안들에 있어서 더 효과적으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국제사회 일들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을 이제 모색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국제연맹이 처음에 이제 국제기구가 만들어지는데 어떤 역할을 했더라면 이후에 이제 2차 세계대전 국제연합을 통해서 다양한 안전보장에 대한 그리고 인권에 대한 그런 기구가 생겨나게 됐다고 평가받습니다.
3. 전쟁과 인권
그러면 이러한 세계 대전과 인권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국제 평화기구가 창설되면서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한 국가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가 보장받아야 된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됐죠 그래서 국제기구의 창설과 인권보장의 효과들을 보면 민족자결권을 보호했다. 다양한 민족들의 자결권을 가져야 된다라는 그런 자결권을 보장하고 사회권적 인권을 제도화로 이끌었다. 그리고 여성 권리를 제도화시켰고 어린이와 청소년 권리를 제도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선 이러한 이제 민족 자결권과 국제 평화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국제기구가 어떤 이론적 토대를 통해서 만들어졌을까? 했을 때 임마누의 칸트를 통해서 이제 이런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칸트는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주장 했는데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은 잘못된 제도나 오해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기구나 국제법 규범 등 만들어서 잘못된 제조를 수정하고 오해 풀어야 된다 라고 봤던 게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그래서 영구 평화를 위해서 이제 조항들을 만들었고 그 예비 조항으로는 뭐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암암리 유보한 채로 맺은 어떠한 평화 조약도 결코 평화 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독립국가도 뭐 크고 작고에 관계없이 상속 교환 매매 혹은 증여에 의해서 다른 국가의 소유로 전락될 수 없다. 민족자결권이라든지. 뭐 이런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성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조항들이 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상비군은 조망과 완전히 폐지되어야 된다. 국가 간의 대외적 분쟁과 관련해서 어떤 국채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식민지 국가들의 의 어떤 기본적인 이론적 토대가 됐고요.
어떤 국가도 다른 나라와 전쟁 주 장래의 평화 시기의 상호 신뢰를 불가능게 할 것이나다름없는 적대적 행위 뭐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이라든지.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 반역 선동 등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이제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영구 평화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확정 조항이 준수되면 국제사회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거다라고 이제 칸트는 봤는데요. 첫 번째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제여야 된다. 그래서 민중에 의해서 권력이 유지되는 공화정으로 가야 된다. 그리고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들에 의해서 이제 연방 체제를 만들고 국제법이 거기서 만들어져야 된다.
그리고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보편적 우호의 조건은 뭐냐 하면, 우리 이 인간들은 지구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적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편적 우호의 조건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해를 입히거나 적대적으로 먼저 대하지 않는 한 그를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조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칸트는 이 연구 평화론에서 환대의 권리를 얘기를 하는데요. 이게 이제 아까 마지막 확장 조항의 이제 내용인데 환대란 이방인이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을 적대적으로 다루어선 안 된다. 환대의 권리를 인류가 지구 땅덩어리를 공동으로 소유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이다.
모든 인류는 자연권적으로 지구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고 소유한 공동 소유자들은 적대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를 통해서 지구상의 각 지역에 서로 평화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인류는 세계 시민적 체제에 점차 다가설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연구 평화론을 이제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룩된 게 국제연합의 세계인권 선언문이 아닐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에 1945년 국제연합의 헌장이 이제 발표가 되는데요. 인종 성별 인조 언어 종교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인류의 권리와 기본적 자유를 증진시 시키고 축구하기 위해 국제 협력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제연합은 인권의 보편성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 국제연합이 탄생했다라고 보고 있는 거죠요 그리고 1948년 12월 12일 세계 인권 선언이 나오게 되는데요. 엘리나 루즈벨트 의장이 8개국이 인제 UN 인권위원회를 이제 만들어서 여기에서 인권 선언문들을 이제 초안을 작성을 하게 됩니다.
인권의 공동 기준을 마련한 것이 이제 인권 선언 인데 세계의 인권 선언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의 종교 문화 그리고 기존의 이 권리적 체계들을 반영해서 인제 만들어졌던 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제 국제 인권 선언과 함께 이런 인류 대학살를 방지하기 위한 제노 사이드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1948년에 이제 채택이 되고, 1951년에 발효가 됩니다. 특정 인종에 대해서 집단 사례에 가 있는 경우에 국제적인 범죄라는 것을 규정을 하고 처벌을 하는 그러한 협약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자행 이후 국제법이제 만들어지게 됐다고 이제 볼 수 있습니다. 처벌 행위는 집단 사례라든지. 뭐 집단 사례를 공동 모의했거나 교사 했거나 미수했거나 공보 인 경우도 다 제노사이드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이제 위배한 행위다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것이 국제재판소에서 형자 재판을 통해서 이 최약국들 의해서 인제 과 재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인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제 세계 이 차 세기의 대전의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뭐 세계 인권 선언과 그리고 제노사이드법들이 나왔고 그다음에 각국의 식민지들의 민족 독립권을 요구하는 민족 자결주의가 또 영향을 미쳤는데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연맹이 만들어졌을 때 윌슨이 얘기했던 것이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라고 주장을 해요. 그런 것은 많은 당시 이제 제국주의의 식민지국가였던 국가들의 독립에 단초를 제공을 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유럽 열강이라든지.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이제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이 1941년 세계 2차 세계대전 종식 전에 그런 네 가지 인간의 필수적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필수적 자유를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를 얘기하는데요. 표현의 자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 표현의 자유로 얘기하고요. 그리고 분쟁 이면에 종교들에 대한 억압이라든지. 뭐 이런 특정 종교에 대한 혐화라든지. 뭐 이런 것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종교의 자유 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뭐 신교와 구교 유대교와 이슬람교 뭐 이런 것들의 모든 종교로부터의 자유 그다음에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이 빈곤으로부터 자유가 최소한 보장되어야 된다.
그리고 전쟁 이런 공포로부터 자유는 이제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전쟁 이차 세계대전 존식 이후에는 인간이 이런 최소한 네 가지 자유에 기초한 세계를 이제 고대한다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연두 교서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 발표에 감명을 받았던 로먼 로게리라는 화가는 이런 포스터를 작성해서 이러 권리에 대한 것을 의미를 전파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이 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또다시 한번 표현과 종교 공포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이 사회권, 결핍으로 후의 자유까지도 보장되어야 된다라는 것을 이제 주장하게 됐다. 이후 이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많은 시민들은 결핍의 문제들을 경험을 하게 돼요.
그리고 결핍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국가가 나서야 된다라는 어떤 사회적 합의들이 이루어졌고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오면서 이 영국이 시민들이 이제 베버리지 보고서에 기반한 정책을 수행하겠다라는 노동당을 1945년에 이제 뽑게 되거든요. 세계 2차 간 세계대전은 사회권의 확보하고도 이제 연관이 되는 그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또 이제 전쟁 시기에 또 뭐 군수 물자 회사라든지 여기에 참여하고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되면서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들이 더 높아졌고 실제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많은 국가들이 특히나 이제 프랑스는 백 여년에 시간 이후에 여성 참정권을 갖게 되거든요. 그래서 1945년에 이제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고 우리나라는 1948년에 여성과 남성 모두 참정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전쟁 이후에 많은 여성들 참정권을 또 갖게 됐다. 보통 선거권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동 청소년 권리의 제도화 가 되는데요. 이 UN이 1959년 아동 청소년 권리 선언을 하게 됩니다. 전쟁 동안 이제 아이들이 다양한 교육이라든지. 영양이라든지. 이런 문제들 전쟁 이후에 아동청소년을 잘 양육해야 된다라는 권리 선언을 하게 되는데 뭐 인종 종교 태생 또는 성별로 인한 차별받으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및 사회적으로 발전 발달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 이름바 국적을 가질 권리 그러니까 당시에 많은 아이들이 또 전쟁으로 인한 고아가 되거나 전쟁 고아가 되거나 뭐 이런 상황 이제 빠지게 되죠. 그래서 그런 권리가 있다. 아동들한테 그리고 적절한 영향이나 주거 의료 등의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고 보살핍을 받을 권리 그리고 애정이 있는 환경에서 양육될 권리를 보장해야 된다.
그리고 의무 교육을 받을 권리와 놀이 여가의 시간을 가질 권리 그리고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먼저 보호받고 구조될 권리 그리고 학대 방임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인간 상호 간 우정 평화 및 형제의 정신으로 양육될 권리를 지닌다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대전 이후 그 민족자결주의라든지. 그리고 세계 기구를 통한 인류의 인권 선언이 확보되고 되고 그리고 사회권의 확장 그리고 여성의 투표권 그리고 아동 청소년의 권리 제도화 이런 곳에 이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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