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학/사회복지와 인권

인권의 역사-방통대 사회복지와 인권(2)

raynewfold 2024. 8. 29. 00:30

인권의 역사적 조건이 무엇인지에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봉건제가 근대화로 넘어가는 시점에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과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두 번째는 도시의 발달과 중세 가치관의 붕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회 계약과 근대적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자군 전쟁과 인권

 

인권의 역사적 조건 첫 번째는 십자군 전쟁과 그것의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요.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 중세 유럽을 아주 대표하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봉건제라는 사회의 제도를 통해서 사회가 유지됐는데 이러한 봉건제가 몰락하게 된 계기가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변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첫 번째 봉건 사회의 붕괴와 두 번째 로마 카톨릭의 약화가 중서 중세 유럽 사회를 이제 변화시켰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봉건 사회의 붕괴는 흑사병 그리고 농업의 발달 도시의 발달로 인제 살펴볼 수가 있고, 로마 카톨릭의 약화는 교회가 서방 교회와 동방교회로 분열되는 대분열과 교황의 아비늉 유수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한 개인들이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고 봉건제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오면서 중세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제일 중심적인 핵심 사상은 신이 중심이 된 사회였습니다. 신이 생각한다. 고로 내가 신의 신의 생각들을 행해야 한다. 그래서 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성직자가 가장 파워가 센 그런 이제 사회였다. 로마 멸망 이후에 르네상스 시기까지를 중세라고 볼 수가 있는데, 5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중세 가 이제 이어졌다.

이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존재가 성직자였고 그 다음에 군주는 신에 의해서 권력을 부여받은 존재죠 왕권 신수수설의 중심이 되었던 존재였고 그 다음에 귀족과 기사들 그리고 농노로 이어진 이런 이제 봉건제 시스템 이 가동된 사회였다. 이 각각의 계급은 자기의 직분들을 잘 맡아서 하는 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거였다. 농노는 열심히 일을 해서 기사들과 귀족들에게 음식과 식량들을 주고 그리고 기사와 귀족들은 이 농노를 보호해 주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황에 권력이 굉장히 이제 파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사건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황제와 왕들은 자신의 지역에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데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직위하면서 교황의 교회의 권력을 굉장히 힘을 싫겠다고 생각해서 성직자 인명권을 교회로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던중 하인리 4세 교황인 황제인 하인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 4세와 그레고리 7세가 이제 갈등을 빚게 됩니다.  교황은 왕을 파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하인리 4세를 파문 합니다. 당시 또 다른 영주들이라든지. 귀족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교황은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서 파문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파문을 한 사실을 알게된 하인리 4세가 교황을 이제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교황이 하인리가 군대를 끌고 온다고 생각을 해서 자신을 지지했던 귀족의 성으로 몸을 피신하게 됩니다. 그것이 카노사 성인데 이 카노사의 성에 교황이 칩거하고 있었는데, 하인리 4세가 군대를 이끌지 않고 자신과 부인만이 카노사의 섬으로 갑니다.

그는 맨발과 남루한 옷을 입고 추운 125일에 카노사 성에 도착하여 앞에서 자신의 용서를 이제 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28일 교황에게 용서 구한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황제의 직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력이 왕보다 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교황의 힘에 의존하는 영주들이 생깁니다.

 

● 십자가전쟁

이시기에 동방에서는 이슬람의 점령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투르크족에 의해 성지인 예루살렘이 점령을 당하여 성지 순례를 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수도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니까. 동로마 황제의 로마노스 4세가 교황 우루바노 2세에게 구조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십자군 전쟁의 계기가 됩니다.

 

이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와 이슬람 사이에 계속 끊임없는 분쟁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을 이슬람 국가인 투르크족이 점령을 하면서 문제가 생겼고 동로마가 서로마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게 하면서우루바노2세는 공의회를 개최해서 종교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십자군을 생성합니다.

이 십자군에는 기사, 농노, 상인 등 여러 계층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여러 계층들은 참여 이유는 교황의 생각이 큽니다.

교황은이 기회에 교회를 통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황권은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교황은 전쟁을 참여하게 되고요. 왕과 봉건 영주들은 영지를 확 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당시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면 상행위를 활발히 할 수 있겠다. 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됐고 농노들은 전쟁에 참여하면 신분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다양한 계층들이 이제 참여를 하게 되고 8차례의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요. 원정에서는 예루살렘을 탈환에 성공하지만 그 다음에 이슬람 세력이 반격하면서 실패를 거듭하여 8차레나 계속됩니다.

 

이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그에 대한 비용들이 굉장히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이 십자군 전쟁은 당시 교황권이 쇠퇴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오히려 교황은 이 전쟁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 교황권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 전쟁이 패배로 끝나면서 교황권의 힘이 없어지고 특히 교황을 지지했던 영주라든지. 기사들이 귀족이 몰락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 비용이라든지. 사망으로 인해 귀족 계층의 몰락이 교황권의 몰락에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보시면, 될 거 같아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서 도시가 또 발달하게 되거든요.

당시 인제 전쟁의 물류 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 무역 도시로 바뀌게 되고 그리고 이러 상황에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국가는 세금을 더 많이 부여하게 되는데 필리프 4세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왕이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저항을 하게 되거든요. 당시 교황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가 이것에 저항을 하자.  아나니성에 교황이 있었는데, 성에 찾아가서 이 필리프 4세가 이제 교황의 뺨을 때리는 모욕감을 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 보니파시오 8세는 한 달 뒤에 이 모욕적인 일 뒤에 사망을 하게 되고 이후에 프랑스 국왕은 자기가 직접 교황을 선출하고 그리고 프랑스에 교양청을 만들어서 국왕의 보호에 두는 아비용 유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클레멘스 5세가 선출이 되고, 아비늉에 새롭게 교황청을 만들어서 이것을 바빌론의 유수에서 따온 아비뇽의 유수 사건이 됩니다. 이로써 이제 교환권이 쇠퇴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

십자군의 영향은 정치 종교 문화 경제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다양한 그 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정치적 영향을 살펴보면 교환권이 쇠퇴가 되고 교향을 지지했던 영주와 기사 세력이 이제 이 전쟁으로 인해서 몰락하게 되면서 거기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 나타났던 것이 왕권입니다. 그래서 절대 왕권이 탄생하게 되는 그런 이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왕권이 신장이 됨으로 인해서 절대 왕권 체제로 이행하게 됐고 그리고 이 중앙 예전에는 영주에 의해서 지역에서 이렇게 다스려졌는데 중앙집권 전 체제가 가능하게 된 거죠. 이러한 중앙집권과 절대 왕권으로 인해서 봉건제가  폐지되고 근대 국가가 탄생하는데 이제 영향을 미쳤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십자군 전쟁의 종교적 영향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교양권이 쇠퇴하고 그 다음에 이러 과정 안에서 교회는 점점 분열되고 통일성이 약화되는 사건들을 겪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후에 기독교 비교적 중세적 통합성이 약화되고 왕권의 중앙집권 하에 입조하게 되는 교황권의 힘이 어떻게 보면 왕권과 종교가 분리돼서 권력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왕에게 권력들이 이양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화적 영향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이 중세는 신중심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직자가 가장 이제 중심인 사회였는데 교황권의 쇠퇴로 인해서 이 신중심의 문화가 당시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가져 다양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들 유입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유입이 되고요. 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인간 중심 사상들이 굉장히 많았던 그런 문화이죠. 그리고 이슬람과 비잔틴 문화가 유입되면서 르네상스라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명 이제 탄생하는 그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영향도 굉장히 컸는데요.

지중해 무역을 통해서 동방 무역이 발달했던 것들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도시 발달을 추진시키고 시켰고 상업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이 상공업의 발달이 일어나게 됐다. 그래서 전쟁 물류을 이렇게 모아서 이렇게 주입했던 그런 도시들이 이 상공업 발달에 도시로 무역의 중심의 도시로 탄생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 십자군 전쟁이라고 이제 볼 수 있습니다.

 

2. 도시발달과 중세 가치관의 붕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그동안의 중세의 기틀이었던 것들이 무너지게 됐는데요.

신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문화의 영향을 받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 역시도 이 교황권에서 왕권으로 그리고 봉건제 시스템에서 도시 중심으로 이 사회들이 변했다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발달이 그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도시는 어떻게 발달했고 중세 가치관은 어떻게 붕괴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으로 인한 변화

전쟁을 겪으면서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과 도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콜롬버스가 신항로 신대륙을 이제 발견함으로 인해서 금은으로 된 화폐가 이제 발달하게 됐고 그리고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이제 상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농어촌 지역의 많은 인구들이 도시 로 유입되는 현상들이 일어나면서 상업과 수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이  더 증가하는 그러한 이제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주들이 과거의 현물로 받던 지대를 화폐로 받는 화폐 유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사회가 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화폐로 지대를 받게 되면서 이 영주의 땅에 있는 농노들의 신분들도 많이 이제 바뀌기 되는요. 당시 화폐가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이제 영주들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됐습니다.

그래서 농노들한테 돈을 받고 자유 농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 한쪽에선 이루어졌고 그다음에 농노들한테 지대를 받는 거보다 양을 키워서 털을 살게 되면 더 많은 이제 수입을 얻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이제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양을 키우게 되면서 과거 영주는 농노를 보호한다라는 그러 계약 관계 주종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는 그런 이제 상황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농민반란

이런 상황에서 농민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14세기 중엽에는 유럽의 흑사병이 시작되면서 많은 유럽의 인구들이 이제 격감하게 됩니다.

유럽 인구의 3분의1 이 이제 흑사병으로 격감이 되었고 이러한 인구 감소는 농민의 신분 상승을 이제 유도합니다. 그래서 영주와 계급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당시 영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지는 상황에서 농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넘 부여하게 되고 부역을 강요하게 되면서 농노들이 이것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프랑스의 농민 반란을 1358년에 자크리의 반란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자크리는 그 당시 누비의 옷이라고 볼 수 있는데, 농민들이 입는 옷이다.

그래서 이런 자크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자크리의 반란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1381년에 영국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금을 이제 높이고 강제 부역을 통해서 봉건제를 더 강화하려고 했던 영주들에게 반발해서 일어났던 농민 반란이 이 봉건체계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 계기였다.

 

 길드의 변화

상업에서도 이 봉건 체제의 모습을 했던 길드가 변화되는데요. 길드는 당시 이제 장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제 직인 장이론으로 계급이 이제 나눠지게 되는데요. 장인는 도제를 두는데 이 도제들은 10대라든지.

사춘기의 견습공으로서 이 장애 밑에서 5-6년 년 동안 무보수으로 숙식이나 의보 교육을 받는 그런 이제 도제가 있고요. 위에는 직인.독립적 기술자이면서 보수를 받는 그런 직인들이 존재했고 그다음에 장인 들은 걸작품이라든지. 자기 공장이나 도제를 채용하는 그런 체계가 이 상업체계에는 있었던 거죠. 이 체계들은 길들을 조직해서 수공업자들은 같이 원료를 구입하고 똑같이 물건 생산량을 조절하기도 하고, 그 품질을 관리하는 그런 평등한 조직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구 세기에서 15세기 봉건 수공업자들의 조합을 길드라고 부르는데 이 길드는 굉장히 평등성을 지향했던 조직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드에 그 변화가 일어났는데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 상업으로 상업 자본가들이 무역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이 흑 이익을 발생을 시키니까 공급량을 늘려서 다양한 생산품을 이제 그 물류 유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길드 외부에 수공업 조직을 만들게 되죠. 그래서 외부에서 생겨난 수공업 조직을 지원하고 그리고 또 봉건제에서 속박되었던 자유농로들이 도시로 와서 이 농촌 지역에서 수공업 노동자로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조직안에서도 굉장히 많은 인구들이 증가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길드 외부의 수공업이 이로써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는 거죠.

노동력의 공급과 상업 자본 공가들의 지원으로서 이렇게 길드 외부의 수공업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요. 이러한 것을 위협을 느낀 장인들은 과거에 이에는 경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서로 경쟁하면서 생산을 통제하지 못하고 시장에 종속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직인이나 도제에 대한 통제력도 잃게 되면서 이 길드의 봉건제적인 성격 신분적인 성격을 잃게 되는 거죠. 길드가 이제 와해되는 변질되는 모습을 겪게 됩니다.

 

 도시의 형성

그러면서 이 도시는 계속 이제 성장하고 자유 시민인 부르주아지들이 성장하는데요.

이 도시라는 어원은 어디서 나왔는가 했을 때 이 불어의 브로그에서부터 출발해서 브로그에 사는 사람들을 이제 좁고 이 요세적인 브로그에서 성곽 안에서 그 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부르주아지라고 불렀었는데 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상업이 발전하면서 브로주아지들은 굉장히 강력한 부를 소지하게 되고 이 상행위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 영주들의 영역에서 상행위를 할 세금을 많이 부과하게 되니까. 절대 왕권이 생기게 되면 지역을 넘나들 때마다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의해서 왕에게 또 절대 왕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지방분권인 봉건 체제가 시장 영역에 어떤 제한을 가져오니까 절대 왕권을 지시하는 그런 시민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라고 보면 됩니다.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가치관의 변화

이러한 십자군 원정 이후 도시의 발전은 다양한 봉건 체계의 신분 체계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 도시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인간 중심의 문화가 발전하게 되고 그동안의 신중심의 가치관이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되는 그런 르네상스가 번성하게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종교 개혁이 또 이루어지는데요.

마틴 루터가 가톨릭가 세대부를 팔면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자 이제 성직자를 통해서 성서를 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이 성서를 통해 직접 신과 접촉할 수 있다라는 그러한 프로테스탄트 신교가 이제 탄생하게 됩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이름 원래는 저항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죠. 그래서 기존 구교에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성직자의 권위에서 개인의 종교적 믿음으로 이제 그러한 의미들 바껴나갔고요. 이것은 이후에 상인들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맞아떨어져서 자본주의 사상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이제 탄생하게 되는 계기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 이러한 봉건제에서 근대 사회에 인제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사회계약과 근대적 인간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변화가 어떤 사상적 토대들을 변화시켰는데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사회계약과 근대적 인간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근대적 인간의 탄생은 사회 계약과 함께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계약은 그동안의 국가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존재 했거나 선험적으로 존재한 것이라고 인식되었었는데 인민이 국가와 계약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이다라고 보는 것이 사회계약설입니다.

그동안에 신중심 사회에서는 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국가가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 국가이다라는 그런 생각으로 변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놓은 것이 사회계약설인데 이 사회계획 계약설에는 홉스, 로크, 루소라는 세 명의 큰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홉스는 리바이던이라는 그런 아주 강력한 존재를 통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끝내는 것을 주장을 하는데요.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보자 자기 보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투쟁은 끝낼 수 있는 존재는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것이 리바이던인 거죠. 그것이 이제 당시 시대의 군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군주에게 어떤 복종이라든지. 그런 권리를 양도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자기 보존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라는 게 홉스의  사회계약설입니다. 그래서 홉스는 그 군주 주권론을 주장했고 그다음에 자신의 권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자연권을 군주에게 전면 양도한 천부양도설을 이제 주장합니다. 그리고 절대 복종을 이제 얘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쁜 군주라도 이러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이 절대로 복종해야 된다라고 보는 게 홉스의 생각이었다라면 그런데 이 홉스는 한 가지 혁명적이었던 것은 왕권 신수설 신에 의해서 이제 왕이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서 군주가 권력을 갖게 된 것이라는 새로운 그런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로크는 이후에 자연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원래는 평화적인 상태였고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데 이 백지 상태에서 평화로웠지만 다양한 사유 재산을 보유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을 통해서 신탁 통치를 해야 된다라고 보는 것이 로크의 사상입니다.

신체의 소유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신체를 억압하고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법을 통해서 이제 재산을 지키고 신체 소유를 자유롭게 가질 수 있도록 보호해야 된다. 해서 일부 신탁설이라는 것을 이제 주장하고요. 근데 만약에 국가가 이 사람들의 신체의 자유나 재산권에 침범하면 저항할 수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루소는 이 자연 상태의 원래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했었는데 오히려 인간이 사회를 만들게 되면서 부의 불평등이라든지.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게 됐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해소하는 일반 의지를 실현해야 되는데 일반 의지라는 것은 공공의 이익에 반영하는 의지의 인격체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시민들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서 그런 일반 의지 공공의 이익의 발 실현을 위한 그런 일반 의지를 실현시키고 그다음에 이것은 이제 어떤 양보 불가능한 양도 불가능한 심 인간의 권리 라고 주장했던 게 이제 로소의 사회계약설입니다. 그래서 이 세 논자들을 통해서 근대 인간의 그 존재가 탄생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홉스

홉스는 리바이던을 통해서 통치하는 국가인데 예를 들면, 어떤 반에 가장 힘센 아이가 있으면 사실은 반은 분쟁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이유가 이미 이제 아이가 모든 권한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비슷비슷한 힘이 있는 아이들은 자꾸 대결을 통해서 자기가 우위에 있음을 이제 증명하려고 하죠. 그러다 보니까, 계속 분쟁이 많아지는 거죠. 그런 상태를 홉스는 자연 상태라고 봤던 거죠. 그래서 이런 자연 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존재가 리바이던이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리바이던 일부 14장에 보면, 자연권의 이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자연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성, 즉 자신의 생명 보존을 위해 스스로 원하는 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갖는 자유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판단과 이성 안에서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행하는 자유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별자인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갖는데 그것이 자연권 자유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홉스는 그러 자유 경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이 투쟁을 하게 되고 그럼므로 인해서 오히려 자유를 가진 자연권을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평등할 자연권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계약으로 정치적 질서가 세워져야 된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 근대 국가의 탄생을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법 질서와 법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고자 일정한 자유를 국가에게 위임하는 사회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던 게 홉스인데요.

그것이 군주와의 계약이라고 이제 봤던 것이 홉스의 사회계약론이라고 보시다 될 거 같아요.

 

 로크

로크는 이제 자연법에서 자연 권리로서의 자연권을 주장을 했는데요. 로크는 신이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창조했다. 근데 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서를 이해해야 할 만큼 굉장히 이성적인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자연의 질서나 인간 이성은 자연법에 따라 작동한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과 자유를 추구하지만 스스로 욕망과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이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자연권이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고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보는 게 로크의 입장입니다.

로크는 이 입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를 통해서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을 이 사회가 이제 법률로써 지켜져야 된다라고 봤는데 생명권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할 권리로 굉장히 신이 부여한 권리로 인간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남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도 없다고 보는 것이 생명권이었고, 자유권은 자연법에 따라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르거나 그에 종속되지 않고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자유권은 생명 권과 함께 신이 내린 절대 권리이므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근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이는 재산권에 대한 내용과 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이 재산권을 특히 로크는 이제 주장하면서 이 로크의 재산권이 이후에 부르좌아지들의 시민 혁명에도 이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재산권은 특정한 사물을 소유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용 소비 교환 보완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인데요. 이때 이제 재산권 신은 자연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이 자연은 인간의 노동력을 투입하게 되면 그것을 투입한 사람의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소유의 자유를 이제 얘기를 했는데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데 노동은 신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자연법이 개인에게 자신의 신체에 불가침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생산한 사람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까지는 소유가 아니라 신이 준 것을 점유할 권리가 있었는데, 로크로 인해서 이제 소유권들이 인정되고 그것이 잘 재산권으로 인정되는 그러한 권리로 인정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땅과 곡식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에게 정 방법의 생명권 행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생명권도 존중하려면 남은 땅과 자연을 그 남겨놓아야 한다. 그래서 부패할 만큼 많은 소유는 부도덕하다는 제약 조건을 놓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되 부패하지 않을 정도로 소유해야 된다라는 게 이제 로크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로크는 생명권, 자유권, 제산권을 통해서 이것은 자연권이고 인간이 가져야 될 권리이라고 주장한다.

 

 루소

그 이후에 이제 루소가 전면적으로 사회계약의 사회 계약론을 통해서 이제 명시화했는데요.

사회 질서는 모든 권리의 근본이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이 권리는 자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계약의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입니다. 루소는 그러면 계약은 일반 의지를 통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동등한 존재이고 피통치자들의 일반 의지가 의해서 통치되는 것이라고 봤던 것이 인제 로소의 사회 계약설인데요. 루소는 일반 의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생존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의 자유와 평등을 보존하기 위해 자유롭게 계약을 정치 질서와 국가를 만든다. 개인이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지만 국가는 공동의 숙고를 통해 결정된 의지에 따라 개인의 생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야 된다. 공동의 숙고로 결정되어 국가활동을 결정하는 의지가 일반의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의 숙고로 결정되어 국가의 활동을 결정하는 의지 그것이, 공공의 의지’, ‘일반 의지라고 루소는 주장하고 있는데요. 루소는 사회 계약 에 있어서 저항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나 도처의 사슬에 묶여 있다. 남의 주인을 자처하는 자가 그들보다 더한 노예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폭력과 폭력에서 연유하는 결과 고려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한 인민이 복종을 강요당해 복종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좋다. 인민이 멍에를 뿌리지 칠 수 있어서 그것을 뿌리친다면 그것은 더 좋다. 왜냐하면, 인민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간 자의 권리와 똑같은 권리로 인민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인민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정당하거나 또는 인민에게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원래 정당치 않기 때문에, 인민의 자유를 빼앗아서 가는 그런 경우에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여지를 이제 루소는 주게 되죠.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근대적 인간의 탄생

앞서 언급한 로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사실은 근대 인간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그런 중대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근 이 사회계약설은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째, 이들 모두 정치 질서 또는 국가라는 관계 속에서 인권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는 이 정치 질서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정치 질서나 국가는 선험적으로 또는 초 인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국가는 선험적 초인간적 신에 의해서 이제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했다라면 이것은 국가는 정치 공동체가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이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로는 정치 질서 또는 국가는 무엇보다도 시민의 생존과 자유 실현의 목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 이 세 논자의 사회계약설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간 중세 시대에는 신중심의 사회로 신민 간이 아니라 신을 따르는 백성들인 신민이 존재했더라면 이 사회계약설로 인해서 이제는 신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국가를 만들고 시민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율 적이라는 근대적 인간의 토대를 이제 구축했던 게 사회계약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